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가키 가즈시게 (문단 편집) === 여러차례 실패한 총리의 꿈 === 원래는 사실 총독이 아니라 총리가 먼저 될 수 있었다. [[1927년]] [[와카쓰키 레이지로]][* 와카쓰키 수상은 재임 때 그를 「진정한 평화 애호자」라고 말하고 뒤에 보듯 그를 총독으로 발탁하는 등 그의 재능을 아꼈다.] 다음의 총리으로 내정하려 했는데, 육군장교단이 나서서 적극 방해했다. 이후 한동안 한직을 보낸다. [[1930년]] 7월 [[하마구치 오사치]] 내각에서 다시 육군대신으로 기용되었고, 미수로 끝난 [[1931년]] 3월 [[쿠데타]][* [[고이소 구니아키]] 군무국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계획이었다. 노동법이 상정될 3월 20일 군중 1만명으로 의회, [[입헌민정당]]사, [[수상관저]]를 습격해 혼란을 일으키고 혼란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육군을 보내 계엄령을 선포한다는 계획이었다.] 기도에서 사건에서 총리로 옹립될 수 있었지만 스스로 "군대를 써선 안된다."라고 만류했다(그리고 여전히 육군장교단 일부는 반대했다).[* 일설에는 전후가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. 쿠데타에 관여했으나, 그가 총리 물망에 오르내린다는 이야기가 나온 3월에 갑자기 뒤집었다는 이야기. 여하간 쿠데타는 이후 불문에 부쳐졌고 참여한 장군, 장교들도 처벌받지 않았다.] 이후 하마구치가 암살 미수로 3개월 넘게 입원 치료를 받아 하마구치 내각은 [[시데하라 기주로]] 당시 외무대신의 권한대행 체제가 되었고, 하마구치는 퇴원 후 직무에 복귀했으나 병세가 심해져 1달만에 사임하였다. (그리고 피격 10개월 만에 후유증으로 사망한다.) 그래서 [[1931년]]에 다시 후임 총리로 지명된 와카쓰키는 그를 조선 총독으로 발탁했다. 정당색이 없고, 청렴하다는 이유였다. 전전임 야마나시가 정치 인사 + 탐관오리였다는 것을 고려하여 반대로 뽑은 것. 일각에서는 당시 정권을 잡은 민정당의 의원들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그를 중앙에서 떨어뜨리기 위해서 총독직 던져준 것이라는 말도 있다. [[1936년]] 총독으로 물러난 직후, [[히로타 고키]] 내각이 붕괴되어 수상으로 지명되었으나, 육군 측에서 아예 육군대신을 내지 않겠다고 땡깡을 부려서;; 내각 구상을 무산시켰다. 당시 우가키는 [[쇼와 덴노]]의 부름을 받고 [[도쿄]]로 가던 중이었다. 그런데 가던 도중 헌병감 나카지마 게사코가 올라타 육군의 뜻이라며 조각하지 말 것을 '''협박했다.''' 우가키는 처음엔 나름대로 저항했지만, 육군대신을 추천하지 않겠다는 말에 결국 우가키는 조각을 포기했다. 육군 때문에 총리 지명자가 조각을 포기한 최초의 사건. 결국 총리가 된 사람은 엉뚱하게도 당시 조선 배치군 사령관으로 있었던 [[하야시 센주로]]였다. 이렇게 3번이나 총리 물망에만 오르고 끝난다. [[1938년]] [[6월 3일]] [[고노에 후미마로]]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맡아, [[중화민국]]과의 협상을 통하여 어떻게든 [[중일전쟁]]을 중지시키려 했으나 또 이번에도 군부의 방해로 실패하자 열받아서 [[9월 29일]] 사임했다. 일본 정국에서의 기믹은 가히 사이토의 뒤를 이어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보려 고군분투한 [[기믹]]이다. [[1941년]]에도 [[도조 히데키]] 대신 내각을 맡을 뻔 했지만 도조가 기어코 총리를 먹었다. 4번째 실패. 사실 이때 [[고노에 후미마로]] 총리가 사임하면서 "지금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황실의 가장 큰어른이신 [[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]] 전하밖에 없다."라고 히가시쿠니를 추천했고 도조도 이에 동조했으나 기도 고이치가 "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를 이용하자."라는 논리로 도조를 추천한 것을 [[쇼와 덴노]]가 승낙하는 바람에 생긴 일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